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문단 편집) == 만슈타인의 역습 == 만슈타인은 재빨리 포위망을 뚫을 기동 집단을 제3기갑군단과 제47기갑군단을 근간으로 조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포위망에 갇힌 슈팀머만 집단이 지원 없이 스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못 박았다. 포위망 돌파를 위한 기동 부대 투입이 판터-보탄 방어선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3기갑군단장인 헤르만 브라이트 기갑대장은 2개기갑군단의 공세를 통해 슈팀머만 집단을 구출해 낼 수 있는 회랑을 여는 것이 가능하다고 만슈타인에게 보고했고, 만슈타인은 브라이트의 보고를 근거로 들며 히틀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제47기갑군단이 제11기갑사단을 앞세운 1차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만슈타인은 제3기갑군단에 제11기갑사단이 열지 못한 돌파구를 열라고 명령했다. 브라이트는 제16, 17기갑사단을 그닐로이 티키취 강을 넘게 했고 제1기갑사단과 제1 SS 기갑사단 'LSSAH'로 2개 기갑사단을 북익에서 엄호하게 했다. 이 진격은 괜찮은 효과를 거두며 어느 정도 소련군의 포위망에 돌파구를 내었다. 한편 독일군의 공격을 보고받은 주코프는 바투틴에게 4개 전차군단을 동원해 독일군의 기도를 좌절시키라고 명령했다. 그 무렵, 기온이 올라가며 [[라스푸티차]]가 시작되자 독일군의 진격은 진흙 때문에 느려지는 반면 라스푸티차에 익숙한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서는 문제 없이 전장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2월 5일에서 6일 밤 사이 코네프는 제4근위군과 제5근위기병군단에게 포위망 안으로 공세를 가해 슈팀머만 집단이 포위망 바깥의 독일군과 협격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라스푸티챠 때문에 소련군의 공세에도 차질이 생겼고 슈팀머만은 비킹 사단과 제72사단을 재빨리 후퇴시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2월 7일과 10일 사이에 재정비 후 다시 공세를 할 계획을 세웠지만 포위망을 형성한 부대들의 보급 난항과 제3기갑군단이 그닐로이 티키취 강을 도하하며 무리하게 진격한 제6전차의 보급선을 타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포위망이 안전해지기 힘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